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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김 협(金 협, 1538∼1622)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경직(敬直)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고려 충신 상촌(桑村) 자수(自粹)의 7대 손이며, 좌찬성(左贊成)을 증직(贈職)받은 구연(九淵)의 아들이다. 16세 때 동몽교관이 되었고, 선조 1년(1568) 증광별시(增廣別試)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차례대로 승차되었으며, 선조 20년(1587) 금산군수(金産郡守)로 나갔다가 선조 25년(1592) 철원부사(鐵原府使)로 자리를 옮겼다. 선조 30년(1596)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승차되었고, 선조 30년(1599) 부평부사(富平府使)로 나갔다가 선조 38년(1605) 승계되어 충청감사(忠淸監司)로 전란 후의 민생훈휼에 힘썼다. 광해군 2년(1610) 의정부 참찬(參贊)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광해군 4년(1612) 원종공신 1등에 녹공되어 정 2품에 가자(假資)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난정을 거부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노원에 퇴거하여 서체(書體)연구에 전념하다 광해군 13년(1621)84세로 죽었다. 초서를 잘 썼으며, 사후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되고 묘소는 걸산동(傑山洞)에 있다.

김충렬(金忠烈, 1503∼1560)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다. 휘는 충렬, 자는 국간(國幹)으로 연산군 9년(1503)에 회인현감(懷仁懸監)을 지낸 종윤의 4자로 태어났다. 중종 20년(1525)에 진사가 되었다. 중종 26년(153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중종 27년(1532)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좌랑에서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경기도사(京畿道事)를 지냈다. 호조(戶曺) · 예조(禮曺) · 형조(刑曺)의 정랑(正郞)을 거쳐 장령·사간을 지내다 명종 때 제주목사를 지내고, 명종 8년(1552) 오랑캐가 침범하니 삭령군수로 나갔다가 그곳에서 발병하여 집으로 돌아와 명종 15년(1560) 58세에 죽었다. 묘는 동안동 어운곡(魚雲谷)에 있다.


김연경(金演慶, 1543∼1591)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다. 휘(諱) 연경(演慶), 본관은 강릉(江陵)으로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지낸 충열(忠烈)의 아들이다. 선조 1년(1568) 사마(司馬)에 올랐고, 선조 10년(157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등과(登科)하여 괴원(槐院)에 초배되었으며, 차례로 성균전적(成均典籍) · 좌랑(佐郞) · 정언(正言) · 지평(持平)등을 거쳐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를 지냈으며, 48세의 나이로 조졸(早卒)하였다. 묘소는 파주 교하읍 다율리에 있다. 그의 아들 몽상(夢祥 : 1592∼1640)도 벼슬이 사직(司直)에 이르렀으며, 묘는 동안동 어운곡(魚雲谷)에 있다.

김현(金俔, 1557∼1637)

조선 광해∼인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경이(磬而), 호는 오월당(梧月當)이고,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장취헌(長趣軒) 익휘(益煇)의 아들이며 광산부원군 좌의정·국광의 5대손으로 명종 12년(1557)에 태어났다. 세가 현손으로 정훈을 이어받고 삼종형인 사계(沙溪) 장생선생의 견문을 받아 경술도학을 준수 · 실천하였다. 사용원첨정을 거쳐 신천군수로 부임한 지 3년 만에 임지에서 80세를 일기로 죽었다. 묘는 동두천시 걸산동 진흥골에 있다.


목행선(睦行善, 1609∼1661)

조선 때 문신으로 자는 행지(行之), 호는 남간,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장흠의 아들, 숙부인 승지 대흠의 양자가 되었다. 인조 8년(1630) 진사가 되고 인조 11년(1633) 갑과(甲科)에 1등으로 올라 성균전적과 예조좌랑 · 사헌부의 지평 · 홍문관의 수찬 · 대사성, 예조 · 호조 · 병조참의 · 대사간 · 승지 등을 역임하고, 효종4년(1653)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효종 7년(1656)에 다시 상주목사가 되었다. 효종10년(1659)에 예조참의로 의병사퇴한 후 군직에 있은 지 3년 만인 현종(1661)에 죽었다. 묘는 지행동 산 2번지에 있다.

방륜(方輪, 1464∼1534)

휘는 륜(輪)이며 자(字)는 중여(仲與),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세조 9년에 계화(季和)의 아들로 태어나 성종 22년(1491) 무과에 급제, 오위(五偉)에 배속(配屬)되었다가 강계판관(江界判官)으로 배수(拜搜)되었고, 연산군11년(1505) 만기(滿期)가 되어 내직으로 들어와 군기시부정(軍器侍副正), 도총부경력(都摠府經曆)을 역임하다 갑산부사(甲山府使)로 나갔다. 중종 1년(1506) 승차되어 함경도 병마우후(兵馬虞候)를 제수받고, 누차(累次) 공로(功勞)를 쌓아 주비(朱緋)를 하사(下賜)받고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중종 10년(1515)에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官)을 겸직, 중종15년(1520)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진되었고, 다시회령부사(會寧府使)를 역임하고 죽으니, 나라에서는 30년간이나 변방(邊方)을 수호한 공로를 가상히 여겨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하였다. 묘는 생연동(황말음리)에 있다.


어유소(魚有沼, 1434∼1489)

공은 세종 16년(1434)에 양주( 현 동두천시 지행동)에서 평안도병마수군도절제사 어득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자유(子遊)이다. 문종 원년(1451)에 내금위에 선보(選補)되고 세조 2년(1456) 무과에 1등으로 장원하여 사복시직장(司僕寺直長)과 감찰을 역임하였다. 세조 6년(1460) 여진정벌에 공을 세워 통례문통찬(通禮文通贊)이 되고, 세조 9년(1463)에는 회령부사가 되었다. 세조 13년(1467) 5월에 함길도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좌대장이 되어 이시애의 반군을 토벌하였다. 이시애는 일찍이 회령부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버지 이인화는 판영홍대부사를 지냈고, 그의 할아버지는 검교문하부사를 지낸 길주의 호족이었다. 그는 상(喪)을 당하여 회령부사를 퇴임하고 집에 있다가 아우 이시함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어유소는 예종 원년(1469)에 함경북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성종 2년(1471)에는 좌리공신 4등이 되고 이어 평안북도 절도사를 지냈다. 성종 7년(1476)에는 우참찬으로 도총관을 겸임하였으며, 다음해에 병조판서를 거쳐 성종 9년(1478)에는 우찬성에 올랐다. 어유소는 이듬해인 성종 12년(1481) 이조판서지중추부사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성종 19년(1488)에는 판중추부사 겸 도총관을 지내다, 성종 20년(1489) 10월 왕께서 경기에서 열무하셨는데, 공이 호종하여 영평현에 이르러 원내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당하였다. 성종께서는 크게 슬퍼하시며 위를 거두고 부위를 후하게 주었으며 시호를 정장공(貞莊公)으로 내렸다. 묘소는 동두천시 광암동(미2사단 제2여단 관내)에 있다

이중경(李重庚, 1680∼1757)

휘는 중경, 자는 백야(白也), 호는 쌍호(雙湖)로 조선 영조 때의 문신이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석영(錫齡)의 아들이다.
그는 숙종 28년(1702)에 진사가 되고, 영조 3년(1727)에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설서(設書) · 전적(典籍) · 정언(正言)을 거쳐 헌납(獻納) · 장령(掌令)에 이르러 청도군수, 무주와 안동부사를 역임하고 도승지를 지냈으며 수직(壽職)으로 기노사에 유진 77세 때인 영조 32년(1756) 중로연을 행하였다. 사후에 아들 장오(章吾)의 은전으로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좌찬성이 더해졌으며 묘는 동두천 가정자리(柯亭子里)에 있다. 아들 장오는 영조 때 훈련대장, 손자인 득제(得濟)는 정조 때 형조판서, 증손 석구와 철구는 순조 때 형조참판, 금장을 지낸 철구의 아들 경순(景純)은 철종 때 훈장(訓將), 경순의 아들 봉의는 고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는 등 오세육장이 계승되었다.


이상급(李尙伋, 1571∼1637)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이다. 자는 사언(思彦), 호는 습제(習齊), 본관은 벽진(碧珍)이며, 동몽교관(童夢敎官)을 지낸 희선(喜善)의 아들이다.
선조 33년(1606)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精字) · 저작(著作)등을 지내고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평안도(平安道) 도사(都事)와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쳤으며, 풍기군수 나갔다가 사임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다.
인조반정 후 장령(掌令) · 집의(執義) · 군수 등을 거쳐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올라 군비 확장에 노력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인조를 호종(扈從)했다가 40여 일만에 왕이 산전도(三田度)에서 항복하고,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묘사(廟社)를 모시고 강화도로 간 형 상길(尙吉 : 工曺判書)을 찾아 가는 도중 적에게 살해되었다. 배위(配位) 울산 박씨 묘는 탑동(塔洞) 중봉(中奉)에 있다.

이세진(李世璡, 1669∼1749)

영조 때의 문신이다. 자는 명서(明瑞), 본관은 벽진(碧珍)이며, 영덕(盈德)을 지낸 금호공(琴湖公) 지걸(志傑)의 아들이다.
영조 1년(1725) 양정시(兩庭試) 을과(乙科) 2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 교리(敎理)등을 거쳐 예문관(藝文館) 응교(應敎)가 되고, 외직인 군수(郡守)로 나갔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 다시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예문관 제학(提學)으로 승계되었고,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었다. 말년에 고령으로 지중추(知中樞)가 되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묘소는 동두천동 가정자(柯亭子)리산에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영의정(領議政)조현명(趙顯命) 찬(撰)하였다.


이세근(李世瑾, 1676∼1749)

이세근의 자는 성진(聖珍), 호는 율리(栗里)이며 숙종 2년(1676)년에 출생하였다.
12세 되던 해부터 명제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숙종 23년(1696) 정시문과(廷試文科)에 2등으로 장원하여 옥당에 올랐다. 이후 역리의관, 이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러 영조 9년(1733)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나 퇴유하여 율리(栗里 )내려가 수초열(手抄列) · 성조가언 · 갱장록을 짓고, 영조 24년(1748)에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양주(현 동두천시 보산동)이담면 가정자리 자좌(子坐)에 안장하였다.
지문으로 ≪자제유(自製有≫가 문집으로 전한다.

신익상(申翼相, 1634∼1697)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숙필(叔弼), 호(號)는 성제(醒齊),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예빈시정을 지낸 량(凉)의 아들이다.
현존 1년(1660) 사마시를 거쳐 1662년 정시 문과에 병과를 급제하여 검열 · 봉교등을 거쳐 1672년 홍문록에 올랐다. 숙종 즉위 후 남인이 득세하자 충청도 아산에 은거하였다가, 숙종 6년(1680) 경신(庚申)환국 때 특지로 도승지가 되었으며, 이어 이조참판 · 전라도관찰사 · 부제학 ·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己巳)환국 때 인현왕후를 폐하려 하자, 그 부당함을 즉간하고 사직하여 양주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甲戌) 옥사로 소론이 집권하자 등용되어 공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전서에 조예가 깊었다. 시문집으로는 ≪성재집≫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묘는 상패동 마고개 북향에 있다.


남을진(南乙珍, ?∼?)

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를 지낸 천로(天路)의 아들이다.
공민왕 17년(1368) 현량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한 뒤 공양왕 때 참지문하부사가 되었다. 성품이 곧고 학문을 좋아하며 정몽주(鄭夢周) · 길재(吉再) 등과 교유하였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하여 지사 사천현(沙川縣, 현 동두천시 상패동)에 은거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한 후 태조가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충절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沙川伯)으로 봉하고 계속 회유하였으나. 신하된 사람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감악산(紺岳山)이 감악산에 남아 있다. 영조 때 사천서원(沙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정집(李挺輯, 1691∼1750)

영조 때의 문신이다. 자는 용여(用汝), 본관은 벽진(碧진), 충강공(忠剛公) 상급(尙伋)의 현손(玄孫)이며,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세진(世璡)의 큰아들로 동두천시 동두천동 가정자(柯亭子)에서 태어났다.
영조 4년(1727) 진사(進士)가 되고 서사(筮仕)로 출사하여 교하군수( 交河郡守)에 이르렀으나, 노부(老父)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효성을 다해 간병하여 천수를 누리게 하였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 효자정려(孝子旌閭)문을 내렸다. 묘소는 가정자리에 있다.


이정매(李挺梅, 1698∼1756)

영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화경(和卿), 본관은 벽진(碧珍),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세진(世璡)의 3자(三子)로 동두천시 동두천동 가정자리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두뇌가 명석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셋을 아는 수재였다. 일찍이 명제(明濟) 윤증(尹拯) 선생 권유로 서사(筮仕)로 감역(監役)에 초배되었으며, 승계를 거듭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으나 59세로 죽었다.

이성신(李省身, 1580∼1651)

조선시대의 문신이다. 호는 입암(笠巖)이며, 자는 경삼(景三), 본관은 전의이다.
그의 아들이 우암과 동문수학하고 집의(執義)를 지낸 이자(李梓)이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선조 38년(1605) 진사시에 합격하고 광해군 때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를 시해하려던 사건이 있었다. 이때 이안진 등 360여명의 성균과 유생들과 궁궐 엎드려 음모자의 처벌을 상소했으나 대노한 왕에게 쫓겨나서 고향으로 은퇴하였다. 인조 1년(1623) 정시문과 갑과로 급제하여 검역(檢閱)를 거쳤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에 인조를 모시고 공두로 피난하였다. 그 후 헌납 · 부수찬 · 지평 · 수찬 · 교리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유재란 때는 청과의 화친을 반대하다가 강화회의가 성립되자 관직을 떠나 낙향하였다. 1633년 사간으로 기용되어 집의(執義)를 거쳐 인조 16년(1638) 동부승지를 지냈으며, 10년간 청백한 자리만을 역임한데서도 그의 청렴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자(李자, 1606∼1657)

조선 인조∼효종 때의 문신이다. 호는 쌍계(雙溪), 자는 제백(濟伯), 본관은 전의로 인조 때 동부승지를 지낸 성신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김집(金集)에게 나아가 우암 송시열 · 동춘당 송준길과 함께 학문에 전념하고, 인조11년(1633) 사마에 올랐으며, 5년 뒤인 16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가 박사(博士)로 있다가 주서로 천거되었다. 또 한원으로 들어가서 검열이 되었다가 전적(典籍)으로 좌랑과 정랑을 거쳤으며 여러 번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었고, 무관인 선전관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인조 25년(1647) 봄에 개성부로 나갔다가 이듬해에 장령(掌令)으로 들어와서 필선(弼善)이 되었다.
효종 때에는 호남을 염찰(廉察)하였으며, 효종 원년(1650) 직강(直講)에서 집의로 옮겨 있을 때 광주부윤인 기진흥을 논핵(論劾) 하다가 왕이 노하여 삭직(削職)되었다. 그러나 기진흥이 김자점(金自點)과 반역을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학 난 뒤에 다시 사간(司諫)으로 복직되어 집의(執義) 자리로 돌아왔다. 효종 4년(1653) 거상(居喪)을 마치고 옥당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교리아 수찬이 되었고, 홍문관 · 사헌부 · 사간원을 거쳤고 또 보덕(輔德) · 필선(弼善) · 사성(司成) · 상의(常衣) · 군자감정 등을 겸직도 하였다.
그는 형제 간에도 우의가 깊어 아우 항(杭)과는 한 집에서 살면서 조정에 올라가 영특함을 드날리고 수려한 용모를 서로 자랑하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두 형제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아우(杭, 執義)이 죽은지 1년(1657)만에 그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마차산 선영에 있다.

이종건(李鍾建, 1843∼1930)

한말의 문신으로 자는 치행(致行), 본관은 전주(全州), 병조판서 규철(圭撤)의 아들로 동두천시 탑동(塔洞)에서 태어났다.
17세 때인 철종 10년(1859) 별군으로 특천되었고,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하여 훈정에 임명되었다. 이어 어경리장위 · 오영사 등을 지냈다. 고종 22년(1885) 대원군의 환국에 즈음하여 우포도대장에 임명되어 임오군란의 죄인을 처형하였다. 협판내무부사 · 상리국총판 · 친군전영감독 등을 거쳐 형조판서 신기선(申基善) 사건을 다루기도 하였다. 뒤이어 이루어진 군제개혁때 총어사에 올랐고, 연무공원관리사무사로서 운영담당위원으로 일했다. 1889년 전환국총판 임명에 이어 다음해 다시 협판내무부사와 장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894년 온건 개화파에 의한 갑오개혁으로 척신이 제거될 때 면직당했다. 이후 다시 등용되어 1897년 중추원의관과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고, 육군부장으로 심순택(沈舜澤) 밑에서 군부대신을 지냈다. 이후에도 시종원총관 · 호위청총관 · 한성부판윤 등에 올랐는데 주로 시위와 치안을 담당하였다.
한편 1898년 박정양(朴定陽) 밑에서 의정부찬성이 되어 종로에서 열리는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려다가 도리어 만민공동회에 참석하여 헌의육조(獻議六條)에 동의한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12월 초 독립협회가 환국협회에 의해 해산된 뒤에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 뒤 중추원관제가 개편되고 독립협회 부설을 허가하지 않을 계책으로 협회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충추원의장에 임명되어 다시 벼슬에 올랐다. 당시 만민공동회가 보부상들과 충돌하자 회의 해산을 종용하였지만, 시민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즉 시민들은 그가 전에 군부대신 서기일 때 보부상들의 만민공동회 습격을 방치하였고, 순검과 병사들이 그것을 돕도록 하였다고 비난하고 그의 집까지 습격하였다.
이와 같이 주로 수구파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1880년대 민씨 정권 아래에서는 순조롭게 승진을 하였지만, 이후 개화파의 정치적 등락에 따라 벼슬길에 많은 굴곡을 보였다. 또한 박정양 · 김홍집 등과의 소원한 관계와 한규설(韓圭卨) 등과 친밀하였던 것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광무 4년(1900) 법규교정소 의정관으로서 황제의 정치적 전제권을 명시한 대한제국 제정에 참여하였다. 뒤에 농상공부 대신 · 군무국총장 · 강원도와 평안남도 관찰사 · 군부대신 등을 지냈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직후 일제에 의한 "조선 귀족령"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1930년 10월에 죽었다.


이기조(李基祖, 1803∼?)

조선 말의 무신으로 자는 도원(道源), 본관은 광주(廣州), 진사(進士) 시문(時聞)의 아들로 동두천시 광암동 내촌에서 태어났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일대에서 군기(軍記) · 양식 · 서적 등을 약탈하는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별군관으로 있다가 한성근(韓聖根) · 양헌수(梁憲洙) · 이원희(李元熙)등과 함께 양화진(楊花津) · 광성진(廣成津) · 문수산성(文殊山城) 등지에서 진을 치고 강화도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엄청난 화력을 앞세운 프랑스군의 공격에 밀려 강화성을 일시 빼앗겼다. 1868년 삼회부사를 지냈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 미국 군함 3척이 강화도에 쳐들어 왔다. 이때 부평부사로 조정의 훈령을 받고 현지에 파견되었다. 미국 함대측과 군사 · 외교적 절충을 충실히 수행하여 그들을 물러가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묘는 동두천 광암동 내촌 사곡산(寺谷山)에 있다.

신량(申량, 1596∼1663)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양지(養之), 호는 호은(湖隱)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좌부 승지 응구(應구)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조수륜(趙守倫)에게 학문을 배워 사마시에 합격한 뒤 산감역이 되고, 뒤에 한성부참준 · 공조좌랑 · 구례현감을 지내고 남포에 우거하였다. 그뒤 익위 · 사익위 · 금산군수 · 호조정랑을 사양하였으며, 인조 26년(1648) 태안군수 재직시 남미문제(濫微問題)로 사직하였다. 효종 때 군기시 제용감과 군자감 · 예빈시정을 지냈다. 저서로는 ≪호은집≫이 있다.
묘는 상패동 마고개 북향에 있다.


조진주(曺進周, 1669∼1739)

숙종 때의 문신으로 자는 군욱(君郁), 호는 율촌(栗村)으로 시호는 문충,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춘천 부사를 지낸 한달의 아들이고, 중종 때 의정부 우찬성을 지낸 계상(繼商)의 6세손으로 헌종 10년(1669)에 태어났다.
숙종 17년(1691) 사마시(司馬試)에 올랐으며, 숙종28년(1702)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사헌부 지평(持平), 한성부 서윤(庶尹)을 거쳐 의정부 사인(舍人)을 지내다가 외직에 나가 온양도호부사를 지내고 춘추관 수찬관에 봉직되었으며, 숙종 35년(1709)에 승계되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가선대부에 녹봉되었다. 영조 10년(1734)에 율목동으로 낙향하여 영조 15년(1739)에 죽으니, 나라에서는 문충의 시호를 내리고 광암동 세목(細目)에 장사하였다.

황선신(黃善身, 1570∼1637)

자는 사수(士修), 본관은 평해(平海),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기(琦)의 아들로 지행동에서 태어나 선조30년(1597) 무과에 급제, 벼슬이 훈련원정에 이르렀으며, 인조 14년(1636) 호적이 침입하여 강화부 중군으로 적과 싸우다가 이듬해 순국하였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고 강화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정사호(鄭賜湖, 1553∼1616)

자는 몽여(夢與), 호는 화곡(禾谷)으로 성재 이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조선중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선조 6년(1573)에 사마시양장(司馬試兩場)에 급제한 후 주서(注書) ·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금성헌령(金城縣鈴)으로 임진왜란을 맞아 왕자 일행의 북행길을 호위하고 현민 소개에 힘썼다. 또 정유재란 때 안동부사로 명병(明兵)과 함께 외적을 토벌하여 큰 공을 세워 선조34년(1601) 이래로 다섯 번이나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선조 35년(1602)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해도관찰사 되고, 뒤이어 경상도 · 평안도 ·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609 선조가 죽자 이조참판과 동지춘추관를 겸임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그리고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거쳐 형조판서로 있다가 광해군 8년(1616) 64세로 별세하니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민(忠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는 안흥동 산 21번지에 있다. 시장(諡將)은 경기도관찰사 홍계회(洪啓禧)가 찬(撰)하고, 신도비문은 영의정 유척기의 찬으로 되어있다.

황서(黃瑞, 1514∼1569)

자는 정옥(廷玉), 본관은 평해(平海)이며 충좌위대호군(忠佐衛大護軍)을 지낸 세통(世通)의 아들로 광암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23세 때인 중종 32년(1537)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7년(1552)에는 대사간이 되고 부제학 이조참의를 지냈다. 외직으로 충청 · 전라 · 경상3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선조 2년(1569)에 죽었다.
묘는 생연1동 못골에 있다.


정이주(鄭以周,1530∼1583)

정이주의 자는 방무(邦武), 호는 성제(惺濟)이며, 선조 때의 문신으로 중종 25년(1530)에 진사 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종16년(1558)에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였고, 명종20년(1565)에 요승(夭僧) 보우를 태학생(太學生)들이 탄핵하는 글을 올릴 때, 공은 많은 상소를 지어 올렸다. 선조 1년(1568)에는 갑과에 장원하여 의영고직장, 예문관검열, 승문원주서, 공조 · 형조 · 예조의 3조 좌랑을 지냈다.
성절사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올 때는 향 하나, 책 한 권 없이 돌아와 그나마 남은 물건을 아랫사람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또 정주목사로 있을 때는 백성을 아들과 같이 사랑하고 공무를 물흐르듯 하였고(愛民如子 居官如水),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옷과 그릇 2개가 있는 것을 보고 노하여 불태워 버렸다.
사간원정언 · 지평 · 헌납 · 장령을 역임하고, 경기 · 강원 · 경상 3도 순무어사로 두 번이나 3도(三道)를 순회하면서 맑게 처리하였다. 또한 정언을 세 번, 지평을 네 번, 장령을 여섯 번 지냈으나 국정에 너무 강직하여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율곡 이이 · 초당 허엽 · 남봉 정지연등의 성현과 교분이 두터웠다.
선조 16년(1583)에 54세로 졸(卒)하니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묘는 외안흥동 산 21번지에 있다.

홍순로(洪純老, 1416∼1476)

휘는 안양(安襄), 시호는 정충공(貞忠公),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판중추원사를 지낸 약(約)의 서자(庶子)이다.
어려서부터 완력이 출중하여 궁마(弓馬)를 잘하였는데, 세종의 특명으로 내금위에 배속된 후 벼슬이 사직에 이르렀을 때 세조를 따라 서울에 갔고, 계유정란(癸酉靖亂)때에 3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세조 9년(1464)에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졌다.


신응구(申應구, 1553∼1623)

문신으로 호는 만퇴헌(晩退軒),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동지중추부사 발(撥)의 아들이다. 선조 15년(1582) 사마시에 합격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천거로 장원(掌苑)이 된 후 선조 21년(1588) 괴산현감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했다. 선조 33년(1613)광주목사가 되고 이어 삭령군수, 공조참의를 거쳐 양주목사가 되었다. 광해군 5년(1613)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주창하자 사직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형조함의, 좌부승지를 거쳐 판결사를 지내다 춘천부사가 되어 죽었다.
저서로는 ≪일퇴집(晩退集≫이 있고, 묘소는 상패동에 있다.

신용개(申用漑, 1463∼1519)

호는 이락정(二樂亭)이며,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자는 개지(慨之), 본관은 고령으로 영의정 숙주(叔舟)의 손자이다. 성종 19년(1488)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홍문관 정자 · 수찬 · 교리를 역임하여 성종 23년(1492) 사가독서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어 직제학 · 도승지 등에 기용되었으나 강직한 성품이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갑자사화 때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등용되어 이후 형조참판 · 대제학 · 우참찬 · 대사헌을 거쳐 이조 · 병조 ·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중종 13년(1518)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 저서로는 ≪이락정집(二樂亭集)≫,편서로는 ≪적속문선(積束文選)≫ ·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있으며 묘소는 상패동에 있다.


목호룡(睦虎龍, 1684∼1724)

조선 경종때 사람, 고변의 공으로 부사공신(扶社功臣) 3등으로 동성군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지사에 올랐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상소로 신축사화가 무고로 일어났음이 밝혀지자 체로되어 옥중에서 사망했다.

박수소(朴守素, 1600∼1669)

조선 효종 때 사람, 휘는 수소(守素), 자는 태노(太노)로 본관은 밀양, 병조참판 노(魯)의 아들이다.
관직은 적공감역 인의겸참군(引儀兼參軍)을 역임하였고, 간혹 파직 당하기도 하고 기용되기도 하면서, 사도사주부(司導寺主簿), 별제(別提), 사포랑(司圃郞), 금오(金吾)를 지내다가 예산현감, 봉화현감을 역임하였다. 크게 빼어난 치적을 쌓지 못하였고, 관직 또한 세상에서 현달하지 못하였지만 뛰어난 문장으로 시대를 풍미하였다. 부인은 해평 윤씨로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손녀이다.
묘는 동두천시 상봉암동에 있다.


조중려(趙重呂, 1603∼165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휘는 중여(重呂), 자는 중경(重卿)이다. 호는 휴천(休川),본관은 한양(漢陽)으로 도사를 지낸 간(幹)의 아들이다.
인조 8년(1630) 진사시에 올라 선능참봉·조지서(造紙暑) 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인조 11년(1633)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직되고 다시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에 승계되어 형조좌랑(刑曹佐郞)과 병조 겸 지제교를 거쳐 사간원 정언, 헌납, 사헌부, 지평, 장령 다시 옥당에 올랐고 수찬에서 교리로서 당대의 문신으로 명망이 높아질 때 아까운 나이로 죽었다.
묘는 동두천 상패동(남산모루)에 있다.

홍언수(洪彦修, 1347∼1415)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1392년 7월 이성계가 조선(朝鮮)을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고 송도(松都)를 떠나 동두천시 생연동(못골)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끝내 나가지 않자 태조는 첨지문화부사(僉知門下府使)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하여 예우하였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또한 윤방경의 예에 따라 조선개국원종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에 책록(策錄)하여 예우하였다.


홍약(洪約, ?∼1460)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판충추 언수(彦修)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게 되자 불사이군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구인 이이화정(李梨花亭)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정신은 마땅한 것이지만, 그렇게 될 경우 이 땅의 백성들은 누가 구제 하겠는가¨라는 말을 듣고 정치에 참여하였다. 병농(兵農), 예악(禮樂)에 대한 제도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묘는 생연동 황말음에 있다.

홍결(洪潔, 1470∼1516)

조선초기의 무신으로 자는 청원(淸源), 본관은 남양(南陽), 훈련도정(訓練都正)을 지낸 정로(貞老)의 아들로 동두천시 생연동 못골에서 태어났다.
19세때인 성종 19년(1488)에 특천되어 내금위에 보직되었다가 무과에 급제하여 병마절제도위 감목관(兵馬節制都尉 監牧官)에 배속되었으며, 임기를 다해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로 승계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경상도 병마우후(兵馬우候)에 이르렀으나, 중종 11년(1516) 5월에 47세를 일기로 죽었다.
묘는 출생지인 못골에 있다.


홍진(洪璡, 1595∼1654)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다. 자(字)는 경미(景美), 호(號)는 역헌(轢軒), 사직(司直)을 지낸 수기(守紀)의 증손(曾蓀)이며, 무과(武科)로 첨지중추(僉知中樞)를 지낸 세충(世忠)의 아들로 선조 28년(1595) 생연동 못골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학자로서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학문연구에만 몰두하고 광해군의 폭정에 항거하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인조 15년(1639) 41세의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등과하였다. 형조(刑曹)의 교수(敎授)직에 초배되었고,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승차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승계되어 형조참의(刑曹參義)를 지내다가 효종 5년(1654)에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홍극제(洪克濟, 1545∼?)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이다. 자는 사숙(思淑),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정주목사(定州牧使)를 지낸 준(浚)의 현손(玄孫)이며, 역헌(轢軒) 진(璡)의 아들로 생연동 못골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뜻을 두고 일찍이 우암 송시열(宋時烈)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며, 숙종 17년(1691) 신미증광(辛未增廣)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형조(刑曹)의 별제(別提), 공조좌랑(工曹佐郞),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등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묘는 생연동 황말음에 있다.


정치상(鄭致相, 1658∼1722)

조선 숙종때의 문신으로 자는 퇴경(退卿), 호는 허주(虛舟)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선조 때 형조판서(刑曺判書)를 지낸 화곡(禾谷) 사호(賜湖)의 증손(曾孫)이며, 율탄(栗灘) 전창(展昌)의 아들로 안흥동(安興洞)에서 출생하였다.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시(詩)를 잘 지었으며, 관직은 음사(蔭仕)로 하양현감(河陽懸監)을 지냈고, 전국유람시화집(全國遊覽詩話集)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이담팔경(伊淡八景)이 유명하다. 64세(1722)를 일기로 죽었으며 묘소는 안흥동 선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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